레비스트로스 '야생의사고'와 현대인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1115021002
아주 감명깊었다.
"영화 ‘아바타’에도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주인공 제이크가 통과의례를 겪는 모습이 등장한다. 나비족의 전사가 되려는 제이크는 자신을 허락하는 익룡 ‘이크란’을 찾아 교감에 성공해야 한다. 그 과정에 세련되고 효율적인 매뉴얼이 들어올 틈은 없다. 그것은 차라리 싸움에 가까워 보인다. 그 싸움은 제이크가 인간으로서 이크란의 주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버릴 때 끝난다. 문명 속의 우리는 그런 싸움을 통해 ‘나’란 존재가 다칠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친절’이나 ‘상냥한 미소’의 서비스를 바란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알았다. 교감은 그런 서비스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나’를 지키겠다는 두려움이 오히려 교감을 싸움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임을. 그들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제껏 타자였던 자연과의 교감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교감은 오로지 인간이란 정체성을 버릴 때 가능하다. 통과의례의 고통은 자신을 해체시키는 데 따르는 아픔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의 주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는가. 얼마나 우위에 서려고 노력했는가. 그러기 위해서 '친절'과 '상냥한 미소'라는 가면을 썼는가. 친절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예의의 이면에 담긴 나의 모습들이 나는 밉다.
얼마나 많은 '나'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아니꼬와했을까. 그 아니꼬움을 예의와 친절로 가렸는가. 나는 얼마나 아프기 싫어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