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여성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했던 주제다. 알고 싶었고 결론이 궁금했던 부분.
남성 세계관의 표현 - ‘전희’와 ‘섹스’, ‘강간’
일부 용어들은 남성 세계관을 표현한다. ‘전희’와 ‘섹스’를 보자. ‘섹스’는 일반적으로 남성 오르가즘의 측면에서 정의된다. 반면 여성의 성적 활동은 ‘전희’와 같은 용어들로 지칭된다. 게다가 부차적인 지위로 ‘격하’되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용어들은 정확한 의사소통 혹은 심지어 여성의 성 경험에 대한 사고에 어떤 장애물로 기능할 수 있다.
“강간이라는 법적 정의는 ‘정상적인 힘의 강도’, 즉 어떤 힘의 강도는 성관계에서 용인될 수 있다는 사상에 헌신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매춘’에서의 춘이 봄을 뜻한다. 마치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처럼 포장하는 것. 그리고 여성이 쉽게 탈성애화되는 경향도 많이 보인다. 섹스와 전희의 사례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남성’ 세계관의 표현이라는 지적도 의아한 지점이 있다고 유쌤은 지적. ‘남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동성/무성 등 다양한 남성 있을 수 있다. 흔히 “남자는 다 그래! 밖에서 성욕 해소도 좀 해야되고~~불라불라”할 때에, 자신의 남성됨을 보편으로 과잉해석하는 경향 강하다.
여성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제시된 해결책들은 현실을 정확하게 그 자체로 담아낼 수 있는 어떤 중립적인 언어를 만들고자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게 없다?) 우리는 여성의 마음에 맞는, 경험을 표현해주는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스스로의 언어를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미 사용중인 용어들을 재정의하거나 새로운 낱말들과 새로운 규칙들을 가진 새로운 언어를 발명함으로써 말이다. 그들은 오직 이런 방식만이 남성의 언어와 사고의 제약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도 이런 의견에 상당부분 동의함
메갈리아의 미러링 언어는 남성중심적 언어에 성공적으로 균열을 냈다.
여성 세계관의 표현 - ‘성희롱’
새로운 언어 창조의 좋은 사례
‘성희롱 sexual harassment'라는 용어는 페미니즘의 혁신이다. 성희롱이라는 낱말이 없을 때에는 성희롱적인 현실은 있었지만 그걸 범주지어 표현할 수 없었다. 맨스플레인도 좋은 사례일 것이다.
여성들의 경험에 대한 스스로의 논의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문제에 공통된 어떤 많은 요소들을 볼 수 있게끔 이끌었으며 그 결과 그들은 ‘성희롱’과 같은 용어를 개발할 수 있었다. 그 문제가 명명되자마자 법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성희롱과 투쟁하는 것이 훨씬 쉬워졌다. (팔리 1978; 스펜더1985)
성희롱이 ‘희롱’이라는, 장난에 불과한 용어라서 또다른 변화방안 제기됨. 가령 성(적)괴롭힘sexual harassment. 그러나 성희롱의 어원이 장난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실제 사용에 있어서 꽤나 유통되었고 한계를 아직까진 보이진 않는 것으로 보이기에 그냥 사용해도 된다는 목소리도 있음.
성적 괴롭힘이 없더라도 gender harassment도 지적해야 함. “여성은 주차 잘 못해”하는 말은 성적인 괴롭힘은 없음에도 분명 성차별적임.
해석학적 불평등
미란다 프릭커는 현실을 표현해주는 낱말이 없는 상황과 같은 간극을 일종의 해석학적 불평등이라고 일컫는다.
“누군가의 사회적 경험의 어떤 의미있는 영역이 공동의 언어적/개념적 자원에서의 간극으로 인해 공통의 이해로부터 모호하게”될 때 발생하는 것. 그리고 이는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적으로 불리한 집단에게 더욱 해롭다.
이런 인식론적 불평등은 윤리학적으로도, 인식론적으로도 문제적임. 가령 누군가 증언을 할 때가 있다. 증언의 신뢰성, 가치는 어디에 오는가? 아마 공통의 이해로부터 오겠지..
이런 해석학적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으로 ‘they' 사례가 있다. he/she의 젠더중립적 사용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연구로 인해, 권위적인 문법학자들조차 이제는 ’they'를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에서도 ‘그녀’ 활용방안이 제기됨. 항상 ‘그’만 말할 것이 아니라 ‘그녀’로도 자주 말하자. 근데 이것이 성별을 명확히 구분하는 영어 혹은 서양어의 단순 번역어에 불과하다는 문제가 있음. 실제로 ‘그녀’는 문어에 불과할 뿐 구어로는 잘 사용되지 않음.
자기 규정적 수행문 - “나는 채식주의자이다”
말의 효력은 다차원적인 것이다. 즉 “나는 채식주의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그렇게 되도록 동기를 유발하지만, “나는 페라리를 갖고 있습니다”는 그런 동기를 제공하지 않는다. 전자는 자기 규정적인 수행문 self-prescriptive performative인 반면, 후자는 단순한 거짓말일 수 있다.
자기 규정적인 수행문은 내 자신을 채식주의자로 만드는 과정의 일부이다. 내 라이프스타일에서의 변화를 다른 이들에게 통보함으로써, 그런 어떤 변화를 발생시킴으로써 말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자기 규정적인 수행문에 착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단어들을 발견하고 창조해오고 있다. 존재의 방식을 기술하고 규정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자기 규정적인 수행문은 한 개인의 변화에 있어서 결정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내 친구가 “나 동성애 괜찮아”하고 말했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자기 규정적인 수행문 역시 젠더 중립적이지 않고 복잡해 보인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나는 이성애자입니다”와 다른 영향을 갖진 않는가? “나는 메갈이다”는 또 어떤가?
나에 대한 설명이 확대로 해석되거나, 해석하는 상황들을 자주 마주할 수 있다고 한다. 남자애 앞에서 “나 게이야”라고 하면 “미안..”이라고 대답하는데, 이거 뭔 개소리냐. 나에 대한 설명에 불과한 건데..?
새로운 언어의 한계와 문제점
이 지점이 가장 어렵게 느껴진다..
새로운 언어가 성공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한계나 문제점을 드러낸 경우도 있었다. 첫째로는, 새로운 언어들이 그렇게 상상대로 성공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어떤 경우는 언어가 있음에도 사용자들의 인식이 변화하지 못하기도 했고, 어떤 경우는 발명된 언어가 불완전하기도 했고, 어떤 경우는 꽤 괜찮았지만 단순히 인기를 끌지 못하기도 했다. 둘째는, 언어의 발명이 실상 낱말의 창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언어 자체가 갖고 있는 근본적 문제일 것이다.
언어가 있음에도 사용자들의 인식이 변화하지 못한 경우로는 ‘chairperson’과 같은 사례가 있겠다.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을 중립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chairperson이라는 말이 도입됐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여전히 암묵적으로는 직책을 맡은 남성이 chairman으로 불렸고, 따라서 여성도 어떤 경우에 chairman이 될 ‘수는 있었던’ 것에 비해 이제는 오로지 chairperson으로만 불리며 남성과 명백히 구분되어 지위 하락에 일조하게 되기도 했다.
발명된 언어가 불완전했던 사례로는 ‘장애우’가 있다. 장애우는 장애인이 갖고 있는 부정적 가치판단을 개선하기 위해 도입되었으나, 실상 장애인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고 오히려 장애인이 갖고 있는 주체적 지위를 ‘친구’로 두는 결과를 초래해, 장애인이 자신을 표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단편적 낱말의 창조가 갖고 있는 한계도 있었다. 데보라 카메론은 어떤 특별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남성이 표준으로 간주되는 다음의 사례를 제공한다.
“활력의 결핍은 건장한 청년들이 너무 적다는 사실에 의해 악화된다. 그들은 모두 노인, 장애인, 여성들, 아이들을 남겨둔 채로 직장으로 떠났거나 직장을 구하고 있다.”
위 글은 오로지 건장한 청년들만을 수면위로 등장시킨다. 게다가 이것과 같은 사례들은 신문 편집자들과 많은 독자들에게 ‘주목되지’ 못한 채 통용된다. 어떤 배제어나 혐오어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어떤 문제가 있지만, 어떤 특별한 용어를 불쾌하고 개선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선별함으로써 정확한 이유를 짚어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을 표준으로 간주하는 언어 사용을 근절하는 것은, 몇몇 용어나 용례 규칙들을 변화하는 것 이상을 표현하는 것이 틀림없다.
공통된 여성 언어의 문제점
만일 위 비판이 옳다면, 여성들은 확실히 스스로의 언어를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 많은 이들은 여성의 언어가 여성의 사고를 주변부로 운명지을 것이며, 페미니즘적인 진보를 방해할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이 결론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여성의 경험과 현실을 드러내기 위했지만, 게토화되어서 그들만 사용하게 되거나 혹은 오히려 현실과 분리되어버리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게다가 여성들은 스스로의 모든 경험에 대한 표현을 허용할 어떤 공통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은, 여성들이 서로 엄청나게 다르다는 사실을 잘 보지 못하는 듯 보인다. 남성중심어/남성보편어가 여성을 지워온만큼, 여성중심어/여성보편어가 여성 내 차이를 지울 수 있다는 것이다. ‘양성평등이’ 가까운 사례일 것이다.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할 수도 없다면, 어째서 여성들이 어떤 언어를 성공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사울, 2010)
강의가 끝났다. 강의 끝나니 머리가 더 복잡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얼만큼 공통(으로 간주되어버린)의 문법과 규범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문법과 규범에 균열을 내는 것만으로 만족하기에는, 그것도 역시 그 문법과 규범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남성을 전복하기 위해 남성의 언어로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전혀 새로운 언어는 가능한가?
페미니즘은 반대항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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