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철학 페미니즘 3강
3강. 언어는 남성의 것인가?
이 장에서는 구체적 언어, 사례들에 집중하지 않겠다. 언어 자체가 남성의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
내 생각엔 언어가 남성의 것인 것 같은데.. 그래서 파괴하자일까? 전복하자일까? 새로 생성하자일까? 궁금하다. 강의 들어보자.
특정한 단어의 문제가 아니다.
페넬로페와 스펜더는 문제가 특정한 단어의 모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언어는 남성 세계관을 상당히 일반적으로 표현하고 여성을 종속시키고 보이지 않도록 만들며, 남성을 표준으로 삼는다.
특히 데일 스펜더는 지배 집단으로서의 남성이 언어, 사고, 현실을 만들어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모든 페미니스트들이 스펜더의 비관주의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철학자(부르디외)는 “언어에 불평등이 반영되었을 뿐, 즉 불평등의 결과로 불평등한 언어가 만들어졌을 뿐이다”라고 주장했고, 매키넌과 스펜더 등은 “언어 자체가 억압이며 억압의 원인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발화에서의 성차별주의를 피하기 위한 시도들이 과연 페미니즘에서의 진보인지, 혹은 여성에게 해로움을 주는 언어의 작동이 단순히 권력관계의 징후임을 확인하는 것에 그치는 것인지의 차이를 가져왔다.
언어는 남성적이다. - ‘노총각’과 ‘노처녀’, “그는 프로야”와 “그녀는 프로야”
스펜더 등은 몇몇 단어들이 남성 중심적인 것과 같은 매커니즘으로 언어 자체도 남성 중심적이라고 주장한다. 언어의 남성적인 편견은 너무나 광범위하기 때문에, 문제를 전체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단어의 수집에 두는 것은 잘못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시 단어의 수집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
1. 언어에는 여성에 대한 것보다는 남성에 대한 단어들이 더 많다.
2. 여성에 대한 단어는 그 단어가 남성을 지칭했던 것과 동일한 상태나 조건을 지칭할 때조차 어떤 부정적인 내포를 취한다. ‘노총각’과 ‘노처녀’처럼 말이다.
3. 여성에 대한 단어는 남성에 대한 단어들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성애화되며, 이는 심지어 중립적인 단어들에도 그것들이 여성들에게 적용될 경우 그렇게 된다.
이 세 근거를 통해 단어모음이 아닌 언어 자체의 남성중심성을 주장함.
똑같은 욕도 놈보다 년이 더 파괴적..
그리고 이 근거들은 직접적인 근거라기보다는 사실 나열에 가까운데, 그래서 부르디외의 주장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남성들은 사회에서 훨씬 더 많은 권력을 가져 왔으며, 이는 언어를 통해 세계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강화할 수 있는 권력을 포함시켜왔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분명히 언어 속에는 성차별주의가 있다. 그것은 남성들의 지위를 정말로 강화하며, 남성들은 문화 형태들의 생산에 대한 통제를 분명히 가져왔다.”(스펜더, 1985: 144)
남성의 언어가 여성의 사고, 현실을 만들어냈다.
스펜더와 같은 이론가들에 따르면, 언어를 통제할 수 있는 남성들의 능력은 그들에게 정말로 많은 권력을 제공해준다. 우리는 소위 남성중심성이 여성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는 방식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성희롱과 같은 여성들의 경험에 대한 낱말이 부족한 곳에서, 여성들은 스스로의 경험의 중요 요소들을 묘사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다.(자세한 것은 4강에서)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은 자신들의 사고의 중요한 측면을 소통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남성의 표현의 자유는 여성의 표현의 자유를 침묵시킨다”
사피어-워프 가설 : “우리의 세계관은 우리가 말하게 되는 특정 언어의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일부는 언어에 대한 남성의 권력이 남성들로 하여금 사고 뿐만 아니라 현실 또한 형성하게끔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스펜더느 남성들이 “언어, 사고, 현실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매우 강한 형태의 담론적 구성주의이다.
“어떤 것은 담론적으로 구성된다. 그것이 어떤 상당한 정도까지 그것에 부여된 것, 그리고 또는 자기 부여된 것으로 인해 바로 그것인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하스랭거, 1995:99)
쉽게 말해보자면, ‘그것이 그것이게끔 만드는 건 담론이다.’ 관념론적인 입장으로서, 물질성조차도 언어가 부여한다는 것.
언어는 범주화의 일부분인데, 범주화가 불가피하게 우리의 사회적인 관점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위 주장은 설득력을 얻는다. 즉 “젠더화되지 않은 현실이나 젠더화되지 않은 관점이란 없다”
모든 언어가 남성적인 것은 아니다 - ‘피아노’와 ‘동위원소’
너무 당연하게도, 피아노나 동위원소같은 말들은 남성적이진 않다. 생략하겠음.
남성들이 언어, 사고, 현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상당한 비약이다
언어는 사실 통제하려 해도 통제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언어는 일반적인 하나의 권력으로 해석될 수 없다는 입장도 있다.
남성권력은 실제로 있지만, 그 권력으로부터 남성들이 현실을 만들어냈다는 주장으로 옮겨가는 것은 비약이라는 입장. 아마 이 입장이 있는 이유는, 그것을 인정해버리면 더이사 변화의 여지가 없기/너무 적기 때문일 것일까?
정말로 언어가 현실을 만든다면, 언어가 여성의 경험을 모호하게 만든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지적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능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사실 성공적으로 반대한 적은 없지 않나.. 불편감 정도만 느낄 뿐이지.. 그 정도는 가능해보이기도 하는데) 이 질문은 남성의 언어가 현실을 만든다는 주장의 반례로 여겨진다. 또한 하스랭거가 주장했듯이, 현실에 대한 담론 구성주의는 지속될 수 없다.(논문을 찾아봐야겠어)
어쨌든 구체적인 용어들의 문제가 여성들이 스스로의 삶에 대해 소통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은 정말로 옳은듯해 보인다. 이런 어려움들은 부분적인 침묵 혹은 부분적인 사고의 제약이라고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문단은 제니퍼 사울이 제시한 일종의 중재안인데, 너무 당연한 결론이 되어버린 듯하다.
Q&A 및 생각거리
1. 언어가 '근본적'으로 권력적이며 그것이 현재 남성적이라는 주장은 어떨까?
언어는 이분법이지만, 이분법은 이미 권력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A. 권력의 허구성을 폭로하거나, B. '남성'의 허구성을 폭로할 수 있다.
A는 언어 자체에 대한 전복이 될 것이며, B는 남성중심어만 '세탁'하는 일이 될 것이다.
2. 스펜더의 주장은 비관적이게 느껴지는데, 스펜더는 대안을 제시했는가?
원서를 안 봐서 정확히 모르겠지만, 기록과 폭로 자체를 일종의 저항으로 볼 수도 있다. 스펜더 자신은 대안적 언어 창조에 초점이 있지는 않고 불평등한 언어 '규제'에 방점이 찍혀 있는 듯하다.